2. 의(義) – 본분 다함의 길, 율법의 무게와 은혜의 자유

의(義)와 본분(本分): 올곧음의 길, 그 빛과 그림자

마음속 보이지 않는 저울은 늘 옳고 그름을 가늠합니다. 인(仁)의 사랑이 관계의 온기라면, 의(義)는 그 온기가 치우침 없이 흐르는 물길이요, 삶의 올곧은 기둥입니다. 유교는 의(義)를 사람됨의 중심으로 여겨, 사사로운 이익보다 의(義)의 빛을 따르는 것이 군자의 길이라 했습니다. 이익을 넘어 마땅한 길을 묻는 존귀함,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에서 공동체의 선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됩니다. 이 의(義)가 삶에 새겨지는 모습이 바로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본분(本分)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의(義)'와 '본분(本分)'이라는 말을 참으로 자주 듣고 되새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루는 공동체 안에서 이 올곧음의 빛은 얼마나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머리로는 그 길을 알지만, 마음과 행동은 여전히 사사로운 이익과 안일함에 더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지, 다시 물어보게 됩니다.

 

실현의 무게, 인간적 노력의 한계

마땅한 본분(本分)을 다하는 삶은 아름답지만, 그 길은 때로 멀고 험합니다. 옳음을 알면서도 작은 이익에 흔들리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두려움과 게으름에 기대어 책임을 외면합니다. 양심의 맑은 소리와 세상의 거친 유혹 사이에서 갈등하며 넘어질 때, ‘본분을 지킨다는 것’은 무거운 바위처럼 어깨를 짓누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 길을 온전히 가려 할수록, 내면의 어둠과 마주하며 ‘과연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 의(義)의 길, 본분을 다하는 삶을 이룰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 물음 앞에 섭니다.

 

다른 차원의 의(義), 먼저 이루신 본분(本分)

스스로 완전한 의(義)에 이를 수 없다는 깊은 자각은, 우리를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이끕니다. 의(義)가 각자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함이라면, 그 의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세상을 지으시고 붙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발견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어떤 의무를 요구하시기 전, 먼저 창조주요 아버지로서의 본분(本分)을 완벽히 이루셨음을 증언합니다.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죄로 멀어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다가오시는 모습, 언약을 저버린 인간에게도 끝까지 신실하신 그 모습은 자신의 본분(本分)을 다하시는 아버지의 깊고 변함없는 의(義)입니다. 그 책임 있는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구원하려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찬란히 빛납니다.

 

덧입는 의(義), 은혜로 주어진 선물

창조주께서 본분(本分)을 이처럼 완전하게 이루신 반면, 우리는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 앞에서 늘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 절망의 자리에서, 복음은 놀라운 희망의 문을 엽니다. 우리가 이룰 수 없던 완전한 본분 다함, 그 참된 의(義)를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온전히 이루셨다는 소식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의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받으심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의(義)를 덧입게 되었다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든 계명을 완벽히 지켜내셨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인간의 모든 본분적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그 의(義)가 이제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의(義)는 더 이상 무거운 율법의 짐이 아닌, 구원받은 자가 감사로 살아내는 삶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덧입은 의'의 옷을 입고,  이 은혜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때로 우리의 삶은 다시 무거운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 스스로의 옳음을 증명하려 애쓰는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값없이 주어진 그 자유와 해방의 선물을 온전히 누리기보다, 여전히 나의 노력과 공로를 의지하려는 옛 습관이 여전히 우리 안에 깊이 남아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풍성한 은혜 앞에서, 과연 우리의 기쁨과 감사가 열매를 맺어, 우리의 이웃에게도 따뜻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마음 깊이 성찰해 봅니다.

 

나의 자리, 은혜로 감당하는 책임

‘본분을 다하는 삶’은 여전히 소중한 지향점이지만, 이제 그 무게는 사뭇 다릅니다. 이전에는 내 힘으로 버겁게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다면, 이제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먼저 이루신 그분의 은혜 안에서,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랑의 응답입니다. 창조주께서 먼저 그의 본분(本分)을 다하시며 우리를 향한 영원한 사랑과 책임을 지키셨음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대신하여 완전한 의(義)를 이루셨음을 믿음으로 끌어안을 때, 우리는 참된 자유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감사함으로 지켜갈 용기를 얻습니다. ‘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하고 싶다’는 사랑의 노래로 바뀌고, 본분(本分)은 의무를 넘어 섬김의 기쁨이 됩니다. 오늘, 내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 앞에서, 나를 먼저 의롭다 하시고자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힘입어, 은혜의 날갯짓으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삶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