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의 숨결: 이름 이전의 근원, 만물을 품는 흐름
고요한 밤, 별빛이 호수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듯, 우리 마음에 때로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대한 흐름, 깊은 숨결 같은 것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노자가 펼쳐 보이는 도(道)의 세계는 이 신비로운 체험의 언저리에서 시작되는 듯합니다. 도덕경(道德經)에서 '말로 규정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듯, 도(道)는 본래 인간의 언어나 사유의 틀에 온전히 담길 수 없는 궁극의 실재입니다. 그것은 만물이 비롯된 무명(無名)의 근원이자, 형언할 수 없는 무상(無狀)의 본체이며, 우주 만물이 운행하는 자연스러운 ‘길’이자 생명의 원리 그 자체입니다. 도(道)는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하며(自然), 모든 것을 낳고 기르지만 스스로를 내세우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無爲).
도(道)의 그림자
계곡 물소리처럼, 산 너머 바람결처럼, 도(道)는 늘 우리 곁에 흐르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이미 참된 도가 아니며, 그 길은 이름도 형체도 없이 모든 것을 낳지만 스스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도(道)는 텅 비어 모든 것을 담고, 자신을 낮추기에 오히려 높아지며, 다투지 않기에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는(不爭) 역설의 진리입니다. 우주는 이 말 없는 도(道)의 숨결 안에서 자연스레 생겨나고 변화하며 스러져 갑니다. 우리는 왜 이 규정할 수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근원을 향해 이토록 애틋한 그리움으로 손을 뻗는 것일까요? 어쩌면 인간 가장 깊은 곳에 이 거대한 생명의 흐름에 동참하여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본연의 갈망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도(道)를 따르는 삶은 그래서 시끄러운 세상 소리를 잠재우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억지로 이루려 하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고요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 없는 가르침, 비움으로 채우는 진리 앞에서, 우리의 삶은 자주 세상의 소란함과 채우려는 욕망으로 가득 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연의 흐름에 맡기기보다 억지로 무언가를 이루려 애쓰고, 내면의 소리보다 외부의 평가에 더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삶의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리들의 분주한 마음을 들여다볼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근원의 또 다른 이름, 말씀(Logos)이신 하나님
형언할 수 없는 궁극적 실재이자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道)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지혜의 전통 속에 나타난 ‘궁극자’에 대한 사유로 이끕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인격적인 하나님(God)과, 만물 창조의 근원이자 우주를 관통하는 원리로써의 ‘로고스(Logos, 말씀)’ 개념이 자리합니다. 도(道)와 로고스(Logos)는 만물의 궁극적인 시작과 존재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유사해 보입니다. 도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보이지 않는 힘이듯, 로고스 또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말씀’은 우주 만물을 꿰뚫는 생명의 숨결처럼,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 고요한 운행과 만물을 포용하는 듯한 느낌은 때로 도(道)의 깊은 울림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가오신 길, 인격으로 만나다
그러나 이 두 흐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존재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인격성(Personality)’과 ‘자기 계시성(Self-Revelation)’입니다. 도(道)는 대부분 특정한 의지나 감정을 지닌 인격적 존재라기보다, 비인격적인 우주의 법칙이나 형언할 수 없는 궁극적 실제로 이해됩니다. 도(道)는 스스로 그러할 뿐(自然),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거나 말을 건네오지 않습니다. 반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신 로고스는 명백히 살아계신 인격적인 실재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고 느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도(道)는 본질상 인간의 언어나 개념으로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워, 주로 자연의 운행이나 마음을 비우는 직관을 통해 어렴풋이 감지될 수 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침묵 속에 숨어 계시기보다 스스로를 적극적인 자기 계시로 나타내 보이시는 분입니다. 그 자기 계시의 절정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노자는 도(道)가 흐르되 붙잡히지 않는다고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길’이 되어 오셨습니다. 도(道)는 세상을 낳았으나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신 사랑은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와 상처 입은 몸으로 우리를 친히 안아주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우리가 만나고 믿고 따라야 할 인격적인 ‘길’ 그 자체이십니다. 이 '다가오신 길', 우리 손을 잡고 함께 걸으시는 사랑의 말씀은 참으로 놀랍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가까이 와 계신 그 길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살아가는지, 혹은 그 인격적인 부르심 앞에서 여전히 우리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더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머리로는 그 사랑을 안다고 하지만, 가슴으로는 그분의 따뜻한 손길을 놓치고, 발걸음은 여전히 옛길을 헤매고 있다면, 우리는 가장 큰 은혜 곁에서 가장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요한 물음 앞에, 다가온 길을 응시하며
길은 언제나 우리에게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무엇이 참된 길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무엇에 내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노자의 도(道)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높아지며, 텅 비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고요하고도 깊은 길입니다. 그 길은 늘 우리 곁에 흐르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느끼거나 그 흐름에 순응할 뿐, 그 길 자체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 없던 궁극의 실재가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고, 눈에 보이지 않던 사랑이 한 사람의 모습으로,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로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고 말하렵니다. 그 음성을 듣고 그 손을 잡을지, 아니면 여전히 익숙한 고요함 속에 머무를지는 각자의 마음에 달린 물음일 것입니다. 다만, 이 ‘다가온 길’은 지금도 세상 모든 마음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며, 들으려는 모든 이에게 그 사랑의 발소리와 노크 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그 길은, 바로 이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함께 걷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길이 아닐지 깊이 묵상해 봅니다.